당신이 슬퍼하지 않아도 되어요, <기분이 없는 기분>
# 할당된 슬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유명한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 말은 주인공 뫼르소가 재판을 받을 때 인간성을 다루는 문제로 연결되어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안게 한다. 부모의 죽음은 마땅히 슬퍼해야할 일이지만 뫼르소의 사정이 어떨는지는 표현되어있지 않으니 우리는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기분이 없는 기분>의 '나'는 경찰서에서 연락 한 통을 받는다.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사인은 고독사라는. 아버지는 수년 전 돈 문제로 의절에 가까운 사이였고 일생을 주식과 사업에 전전하면 인생역전을 노리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잊고 살았고 사망으로 다가오자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도달한다. 그것을 '기분이 없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장례를 치르며 '나'는 생각한다. 상주로서 모르는 사람들을 받으며 울어야 하지만 울 수는 없는 미묘한 경험을 한다. 마땅히 슬퍼해야 하는 이 할당된 슬픔 앞에서 그는 기분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사회적인 자아로서 정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행동을 해야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오늘의 한 줄
1.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2. 나는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보려고, 자꾸 괜찮다고만 했었나보다. 마음을 아주 조금 열어봤더니, 역시나 불안하고 무섭다. 모르는 척하고 얼른 도로 닫아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고장난 데를 고칠 수 없겠지.
#1 아무렇지 않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기분이 없는 기분>은 만화다. 세 컷으로 표현되는 1.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기분이 없는 기분이었다. 라는 문장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표정, 세상 관심 없으면서도 공허한 마음을 '나'의 얼굴로 그려낸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수많은 상처들이 누적되어 컴플렉스가 되고, 그것을 피하려 애쓰며 살아온 삶이다. 허나 막상 그런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거나 리셋되지 않는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해당 장면의 앞 컷에는 단체 카톡 씬이 등장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두고 기뻐하는 친구들의 메시지. 촛불을 들고 사회를 바꿔보겠다고 나섰던 '나' 역시도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바꿨는데 무덤덤하다. 마치 아버지가 상처를 남기고 사라진 것처럼.
#2 상처를 들여다보기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정신과 약처방과 상담치료를 받으며 자신이 애써 숨겨왔던 상처들을 마주한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 나는 괜찮다는 말로 자신을 다독이며 살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비로소 직시한다. 자가 치유되는 상처도 물론 있지만 한 번 흉진 생채기는 평생 그자리에 남아있다. 본인이 그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분리하는 과정을 늦게나마 하면서 '나'는 좀 더 자기 자신과 친해질 것이다. 나는 작중의 '나'가 건강해지기를 바란다. 힘든 일이겠지만 아버지를 떨쳐내고 그 자리에 자신의 것들로 채워하는 미래를 만들어 언제나 기분이 있는 기분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과거의 트라우마, ing 중인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상처를 받으며 자라왔다. 완벽한 부모는 없겠지만 나도 언젠가 미래세대에게 트라우마를 안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우리 부모 역시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도 '나'처럼 기분이 없는 기분을 일상에서 겪고 있다. 즐거움도 슬픔도 노여움도 행복감도 사라진 감정 없는 상황들. 사회생활을 위해 가면을 쓰긴하지만 진심이 아닌 감정들. 전부 내 성향 때문이라, 내가 내성적이라,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라는 식으로 나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았었는데, 그게 내 탓만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힘들겠지만 상처를 잘 들여다보고 나아질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체크해서 긍정적으로 바뀌어나가려 한다. <기분이 없는 기분>은 솔직하고 내밀한 고백이자,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한 줄 코멘트
- <이젠 내가 밉지 않아>: 지독한 자기 혐오를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 <페인트>: 아이가 부모를 고르는 세상이 온다면? 부모도 부모가 처음일 수 있다.
-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기분 부전 장애라는 말을 세상에 알린 이야기. 아픈 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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